평가 1. 기사의 이야기는 보카치오와 보에티우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있었다!

기사의 이야기는 첫 이야기 치고는 여러 모로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그가 한 이야기는 얼핏 듣기에는 당시에 성행하던 로맨스 장르의 한 종류처럼 들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사의 이야기는 실제로 당대 사람들이 즐겨 읽었던 로맨스 작품인 보카치오의 ‘테세이드(Boccaccio's Teseide)’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카치오의 테세이드가 장장 10000줄이 넘어가는 것에 비해, 기사의 이야기는 글로 썼을 때 2500여줄 정도면 쓰여 질 수 있을 만큼 대폭 짧아진 길이의 이야기인 듯 해보였다. 또한 보카치오의 이야기가 보다 정통적인 로맨스 장르로 읽힐 수 있다면, 기사의 이야기는 이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는 기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모종의 재치와 코믹스러움을 가미했기 때문이리라. 즉, 기사는 기본적으로 테세이드와 거의 비슷한 줄거리를 따라 자기 이야기를 전개시켰지만, 같은 상황들을 전달할 때에도 이 모든 진지한 상황들을 영웅적인 서사로 승화시키기 보다는, 매번 궁극적으로는 코믹한 어조로 마무리 시키고 있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an inclination for comic sinking, instead of heroic rising).

기사의 이야기는 또한 후고전기 철학자였던 보에티우스의 ‘철학이 주는 위로(Boethius' The Consolation of Philosophy)’ 에서 인용된 부분들을 많이 담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 서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심오한 철학적 사유들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테면 아르키타가 죽기 직전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내지르는 한탄이 그렇다. 아르키타는 ‘이 세상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한 순간에 사랑을 얻고, 또 한순간에 차가운 무덤에 놓이게 되는 구나! 온연히 혼자, 아무런 동행자도 없이!(What is this world? What does man ask to have? Now with his love, now in the chilling grave, Alone, and with no kind of company!)’ 테세우스의 아버지 아에게우스(Aegeus)가 아르키타의 죽음으로 인해 낙심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부분도 그렇다. 아에게우스는 이야기에서, 너무나도 많은 행복과 슬픔, 슬픔과 행복의 연쇄를 보아 왔기에, 이와 같은 세상의 끊임없는 흥망성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who understood the world's transmutations, Having seen so many of its ups and downs, Joy after woe, grief after happiness;’) 또한 기사의 이야기에서 아에게우스는 말한다. ‘그 어떠한 사람도, 이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보지도 않고 죽은 사람은 없듯이, 이 지구에 살아온 그 어떠한 사람도, 죽지 않은 사람은 없네. 이 세상은 슬픔의 연속일 뿐이네. 우리는 그것을 이리저리 여행하는 순례자일 뿐. 세상의 모든 아픔들은 죽음으로서 비로소 끝을 맺는 것이라네. (Just as no man has ever died, said he, who has not lived in this world in some way, just so there never lived a man, he said, Anywhere on earth, but at some time was dead. This world is but a thoroughfare of woe, And we are pilgrims, travelling to and fro. All earthly troubles have an end in death.)’ 이러한 이야기 속의 다양한 철학적 성찰들은, 대부분 보에티우스의 글에서 인용된 부분들임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평가 2. 기사의 이야기는 대칭적이고 치밀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사의 이야기는 또한, 쉽게 내뱉은 이야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대칭적이고 치밀한 구조(symmetrical structure)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와 같은 대칭성은 두 주인공 기사 팔라몬과 아르키타가 끊임없이 함께 묶여 생각되는 ‘한 쌍’이자 서로에 대한 거울의 상(mirror image)인 마냥 묘사되는 점만 봐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야기의 여러 대목에서, 두 사촌의 싸움 바로 다음에는 그와 대비될 만한 특별한 종류의 우정관계(테세우스와 페로테우스 간의)가 제시 되는 식의, 서로 상반 되고, 비교가 가능할 만한 내용이 연이어 나오는 부분들이 많다. 이야기의 전체적 구조 또한, ‘(테세우스의)결혼 → 정복 → (테베스에서의)장례식’에서 시작해, ‘대결(정복과 유사) → (아르키타의)장례식 → (팔라몬과 에밀리의)결혼’으로 끝나는 식의 비교적 대칭적인 구조를 보이고 있어서 매우 흥미로웠다. 역시 일행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기사이니 만큼 기본적인 학식도 겸비하고 있어, 일견 원작 테세이드 보다는 코믹할지 몰라도, 일행 중 다른 어떤 이들 보다도 더욱 정교하고 고상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가 3. 기사의 이야기에는 시대착오적인(anachronistic) 디테일들이 많았다!

기사의 이야기는 고대 희랍, 로마의 신화적 전통과 중세의 기독교적 전통이 이리저리 짬뽕되어 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는 고대 희랍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 중세적 세계관 및 중세시대의 천문학적 전통들을 반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희랍의 영웅인 테세우스를 공작(duke)이라 묘사하는 점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비너스, 마스, 새턴 등과 같은 희랍 신들이 등장하는 부분들은 그리스적 전통이 보다 많이 반영된 부분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고대 희랍의 철학적 전통(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본으로 한)이 중세적, 기독교적 세계관과 연계되는 부분이 있다는 점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예를 들어 이 이야기 속에서의 ‘첫 번째 움직이는 자(the prime mover)’ 및 '존재의 연쇄고리(the great chain of being)'에 대한 묘사는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자, 이러한 중세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던 고대 희랍 철학적 전통 또한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움직이는 자, 첫 번째 원인께서 처음 사랑의 거대한 연쇄 고리를 만드셨을 때, 그의 목적은 실로 대단했고, 그가 이루어 낸 결과 또한 대단하였도다 [...] 모든 것을 움직이는 자(mover)께서는 영원하시며 절대 변하시지 않는다 [...]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큰 전체에서 비롯된다 [...] 자연은 어떠한 부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불변하는 완전한 존재로부터 처음 파생하여, 거기에서 내려온 이후에야 타락한 것이기 때문이다 [...] 모든 종류의 것들, 모든 과정들은 끊임없는 연쇄(자식 낳기)를 통해 존속한다, 그것들 자체로 영원히 살지는 못하는 것이다 [...] 모든 것의 원인이신 분께서 모든 것들이 처음 파생되어 나온 원천으로 다시 그것들을 되돌려 놓게 되는 것이다(When the first mover, the First Cause above, First created the great chain of love, Great was His purpose, great the consequence [...] The mover is eternal does not change [...] That every part derives from a great Whole, For Nature did not take its beginning From any part or portion of a thing, But from a being perfect and immutable, Descending thence to become corruptible [...] Things of all kinds, all processes, survive By continual succession, do not live For ever and ever [...] who is  Prince and Cause of everything, who converts all back to its proper source from which, in very truth, it first arose?)’

평가 4. 기사 이야기의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듯하다: 운명은 신의 장난이 아니야! 무지한 인간은 운명(Fate)만을 보지만 그것이 신의 섭리(Providence)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기사가 한 이야기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뽑아낼 수 있었다. 기사는 팔라몬과 아르키타의 운명을 통해 인간이 끊임없는 행운과 불행, 흥망성쇄의 연쇄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행이 닥쳤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변덕스런 운명의 장난으로 느끼며(fortune and her fickle wheel) 분노하곤 한다. 그러나 사실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만 유효한 것이리라. 시간의 제약을 초월하신 영원불멸하신 신께서 우리의 별자리에 써놓으신 섭리(providence)를, 무지하고 유한한 인간이 크게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단면들로만 보게 되어, 이를 운명이라 명명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신이 알 수 없는 보다 큰 신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모든 고비들 뒤에 더 큰 뜻이 숨어 있음을 인식하며, 주어진 불행에 순응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기사는 말하려는 듯하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그들의 운명의 바퀴가 언제 다시 내려가거나, 언제 다시 올라가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싸움에서 이긴 아르키타가 스스로가 그렇게 허망하게 죽게 될지 어떻게 알았겠나?

평가 5. 그렇다면 기사의 이야기는 무슨 장르라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이야기는 위에서 언급된 철학적인 교훈들을 적절히 담고 있되, 주된 줄거리는 용맹한 기사 두 명이 한 여자를 두고 싸우는 전형적 로맨스 이야기(Courtly romance)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사의 이야기를 단순한 로맨스 장르로 보기에는 그 이야기가 전달되는 어투가 조금 미묘했다. 예를 들어, 팔라몬이 에밀리를 감옥 창살을 통해 처음 보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게 되는 부분에서, 이 대목이 매우 낭만적인 부분임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팔라몬이 비명을 질렀다고(‘started back with a loud cry, as though he had been bitten to the heart’)말을 한 바 있다. 팔라몬의 반응은 아무리 사랑에 겨운 인물의 반응이라 할지라도 우스꽝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아르키타가 에밀리에게 반해 팔라몬과 옥신각신 하게 되는 대목은 더욱 우스꽝스럽다. 아르키타는 팔라몬이 에밀리에게 가지는 감정은 여신에게 가지는 종교적 마음일 뿐이며, 자신이야 말로 그녀에게 진정한 인간적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Yours is no more than a religious feeling: Mine is real love, love of a human being;’) 이야기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인 아르키타가 죽는 대목에서도, 기사는 에밀 리가 소리를 내지르고, 팔라몬은 탄식했다고 말하고 있다(Emily shrieks, Palamon groans). 상황의 비극적임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연극적인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기사의 이야기는 로맨스 장르에 대한 풍자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기사는 자신을 동행한 아들(squire)이 지나치게 스스로의 외모에 신경을 쓰고, 로맨스 소설의 주된 주제가 되는 ‘기사도 정신 발휘 및 여자 꼬시기’에 지나친 흥미를 두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들을 경계시키는 차원에서, 또 그에게 모종의 교훈을 주기위해, 겉보기에는 로맨스 이야기 같아 보이나, 이야기 내내 그 로맨스 플롯에 적절한 풍자적 거리를 두고, 결국은 사랑 및 인생의 허망함에 대한 철학적 사유로 끝나는, 이러한 풍자적인 이야기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사의 이야기는, 비판적인 유머만이 중심이 되는 풍자라 보기에는, 이를 넘어서는 진지한 철학적 사유 또한 꽤 포함하고 있기에, 그의 이야기를 단순한 코메디가 아닌 하이 코메디라 보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하이 코메디(High comedy)라는 개념은 베르그송의 웃음(Bergson, Le Rire)이란 작품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 코메디이되 그 주된 목적이 철학적이며 진지한 사유인 코메디를 가리키는 개념이다.(comedy, the essential purpose of which is serious and philosophical.)

평가 6. 괜히 겸손한 척 하기는...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우스꽝스럽다 느꼈던 점은, 그가 일종의 수사적 기법(rhetorical technique)의 일환으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사양하겠다며 빼면서 자신의 겸손함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는 꼭 이야기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서 결국은 아주 상세하게 모든 이야기를 하고 만다. 아, 이 기사는 근사하고 멋진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나보군,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어 아르키타의 장례식 장면에서 그의 장례식이 얼마나 화려했는지는 이야기하기 않겠다고 하면서, 결국 기사는 그 장례식에 얼마나 다양한 나무들이 쓰였는지, 화장을 할 때 불길이 얼마나 크게 치솟았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멋진 보물들을 그 장작더미에 던졌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But how they built the pyre as high as heaven [...] Are things I'm not proposing to relate.)

나의 별점: ★★★☆☆

전체적으로 기사의 이야기는 잘 짜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신분에 걸맞게 심오한 철학적 사유들을 담고 있었다. 교훈 또한 비교적 분명히 드러나는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운명 및 인간의 삶에 대한 중세적 철학관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겸손하게 전달하려는 듯 했으나 사실은 이야기에 지나치게 개입을 하게 되어,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목소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싣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에밀리에 대한 이야기가 부족한 점도 수상쩍다. 이야기가 끝나가도록 그녀의 의중 및 욕망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보카치오의 ‘테세이드’의 원형이 되어준, 테세우스 및 팔라몬, 아르키타에 대한 널리 알려진 전설이 있었다면, 기사가 자신의 구미 및 자신의 목적에 맞게 그 전설을 대폭 재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별점 평가에 있어서는 별 다섯 개 중 세 개를 주겠다. 첫 이야기 이므로 너무 후하게 주기는 꺼려진다. 다음 이야기가 기대된다.


6. MAN OF LAW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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