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이야기를 전에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 있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따져보니 보카치오(Boccaccio)의 데카메론(Decameron)에 나왔던 이야기였다. 이후 페트라르카(Petrarch)가 라틴어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 번역본과 Le Livre Griseldis라는 불어 번역본을 참고해서 이야기를 구성한 것 같다. 내가 알던 이야기보다 월터 후작의 비합리적인 의심이나 시험의 강도, 그리젤다의 순응적인 태도 등이 강조되었고, 그리젤다의 옷차림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이 많이 늘어났다. 학자는 본인의 옷차림을 손 볼 생각은 않는 주제에 옷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 것 같다.

학자는 이야기를 끝마치면서 이 이야기의 교훈을 직접 설명해 주었는데, 뭇 여성들이 그리젤다와 같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젤다라는 일개 여성이 일개 개인에게도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신의 섭리에 그처럼 인내심을 갖고 순응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그리젤다와 같은 여성이 우리 주변에 실재할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면서.

    But that everyone, whatever his degree,
    Should be as steadfast in adversity
    As Griselda.' That's why Petrarch tells
    This tale, and in the loftiest of styles.
    For if a woman was so patient
    To a mere mortal, how much more ought we
    Accept what God sends us without complaint,
    For it is reasonable, sirs, that He
    Should test what He has made.
    그 지위가 어떻게 되었든 모든 사람이
    고난과 고통의 상황에서 굳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젤다와 같이.' 페트라르카가 이 이야기를
    멋드러진 스타일로 전해주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즉, 한 여성이 이토록 인내심을 가지고
    한 개인에게 순종했다면, 우리는 더욱이 얼마나
    신이 우리에게 보내는 것을 불평 없이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 신이 자신의 피조물을
    시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부분이 좀 미심쩍다. 이 이야기가 정말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욥(Job)이나 성모 마리아처럼 온갖 고난을 견디며 신이 내려줄 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종교적 비유로 의도된 것이라면, 왜 학자는 대놓고 이런 풀이를 우리한테 직접 해주었을까? 저런 방향으로 생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얼마든지 끼워 맞출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야기의 의미를 한 방향으로 고정시켜버려서 우리가 추측하지 못하게 교란시키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젤다는 우리 모두(Everyman)를 대표할 정도로 일반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너무 심한 시험에도 너무 얌전히 순종하는 바람에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전형적인 여성상도 아니다. 아이들을 빼앗아가서 죽이려 드는 남편을 가만 놔두는 것을 보면, 어쩌면 모성애조차 부족해 보인다. 자신과 월터가 맺은 관계의 조건에 철저히 충실하게 임하는 모습은 보이지만, 인간적인 감정의 영역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젤다는 월터가 시험해올 때마다 항상 굉장히 논리적으로 자신이 순종해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대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종교적인 순종의 차원이라기보다는 정말 무슨 계약의 이행 같다. 학자는 결혼을 격정적인 사랑의 장보다는 확실히 철저한 계약-종속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고, 이야기의 드라마도 이 계약의 한계를 찔러보는 식으로 진행되지 어떤 진정한 감정의 깊이를 시험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적인 비유의 맥락에서 볼 때, 우리는 정말 신과 맺은 약속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일까? 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감동이 아니라? 신은 월터처럼 일부러 아픔을 안겨주기도 하는 존재인가? 심지어 욥의 이야기에서도 직접 고통을 선사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신의 허가 하에 행동하는 사탄이었다. 월터는 신인가 사탄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결혼 얘기가 나온 김에 더 얘기해 보자면, 학자는 확실히 바스 부인에 대한 일종의 대답으로 이런 이야기를 선택한 것 같다. 바스 부인이 해준 이야기는 사랑에서 나오는 권력관계의 유연성과 이동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 주인공들은 (마치 바스 부인 본인처럼) 쾌락과 지배력을 추구했지만, 학자의 이야기에는 사랑이라는 이름 하의 일방적인 권력관계, 그리고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심과 순종의 미덕을 강조했다. 결혼의 본질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학자는 바스 부인이 읊은 본인 과거의 이야기가 못마땅했던 걸까? (바스 부인이 좀 파격적이기는 하다만.) 바스 부인과 같은 여자들에게 열심히 생각대로 해 보라고, 남편에게 순종하지 말고 남자를 울고불고하게 만들라고 부추기며 부른 마지막 노래는 학자의 지금까지의 행동거지를 생각해보면 좀 깨기까지 하는데, 그 노래는 진심이었을까, 비꼬는 것이었을까? 그리젤다와 같은 여자는 요즘 찾아볼 수 없다는 이야기는 그리젤다라는 인물의 극단적인 비현실성을 인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요즘 여성들'이 타락하고 퇴행했다고 욕하는 것일까? 학자 이 양반은 말이 번드르르해서 그렇지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나의 별점: ★★★☆☆

일단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피곤하게 구는 월터도 이해하기 힘들었고 순종하는 그리젤다도 답답해서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별 하나를 뺀다. 또 마지막에 자기 멋대로 자기 이야기에 해석을 달아버렸으므로 별 하나를 더 뺀다. 하지만 재미는 별로 없었어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기에 더 깎지는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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